<맛보기>지영은 냉장고 문을 열고 얼음을 꺼내 술잔 속에 가득 집어넣었다. 벌써 세 잔째였다. 그녀는 아무리 머리 속의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그것은 계속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럴 리가 없다. 그이가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 편집광일 것이리라.그녀는 얼음이 녹기도 전에 술만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서재에 있는 남편의 컴퓨터 앞으로 갔다. 컴퓨터의 파워 버튼을 누르자 귀에 거슬리는 희미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화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워드프로그램을 띄운 뒤 수많은 소설파일 중에서 제목이 ‘아내의 무덤’인 파일에 커서를 놓고 엔터키를 쳤다. 비밀번호? 1464… 그녀는 자판을 확인하며 천천히 숫자를 쳐넣었다. 그리고 다시 엔터키를 쳤다.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책상 위에 놓았던 잔을 들어 술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얼음 녹은 물을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댔다. (전략) …… 진숙과 매리.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녀는 세환의 밥을 챙겨주는 것은 잊어도 동화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쥐새끼를 닮은 옷까지 입은 푸들, 매리의 밥 주는 것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또한 그녀는 언제나 육중한 비계덩어리를 소파에 비스듬히 누이고 바보상자 앞에만 매달려 살았다. 그렇다고 뉴스나 교양 프로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 후 한번도 창의적인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취향 역시 변하지 않고 연속극으로 시작해서 연속극으로 끝났던 것이다.게다가 그녀는 인생의 값어치란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와 귀걸이, 비싼 옷가지들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사들이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썼다. 눈에 띄는 것이라면 세일이라고 사고, 외제라고 사고, 필수품이라고 사고, 소장가치가 높다고 사고….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사들였어도 세환은 언제나 커피잔 같은 필요한 것들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지고 다녀야 했다. 그녀가 비싼 돈을 들여 사들인 것들 중에는 집안에서 쓰이는 것보다도 며칠 후에는 창고에 모셔둬야 하는 것이 태반이 넘었다. 며칠 전 저녁 일만 해도 그랬다. 그가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서면서 보니 베란다 밑의 화단 위에 못 보던 커다란 고철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물건은 ‘고슴도치’라는 이름의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소쿠리를 엎어놓은 것 같은 둥그런 쇠기둥 위로 창같이 뾰족한 침들이 수없이 달려 있었다. 세환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내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또 어디선가 엿장수도 주워가지 않을 고철덩어리를 예술작품이라는 사기꾼의 말에 속아, 누가 사갈세라 허겁지겁 웃돈까지 주고 구입했을 터였다. 그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황세연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1995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96년 장편소설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로 천리안과 홍익출판사가 공동 주관한, 당시 컴퓨터통신 유일의 문학상인 천만원 고료 제2회 컴퓨터통신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7년 장편소설 『미녀사냥꾼』으로 한국추리문학 신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미녀사냥꾼』『드라이 플라워』(Dry Flower)와 단편집 『염화나트륨』이 있다.
E-mail : 007lin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