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보기><1>대문이 닫혔다. 바깥에서 힘껏 잡아당기면 저절로 걸리는 대문이 감옥의 철문처럼 철컹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식구들이 모두 나간 것이다. 아내는 보험회사로, 아이들은 학교로 갔지만 그는 여전히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한명길(韓明吉)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때 명길은 요일에 맞춰 출근할 직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날이 일요일은 아니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아내가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학교와 직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열한 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세수를 하고 부엌에 들어가 아침 겸 점심밥을 먹던 명길은 불현듯 아내가 오늘따라 일찌감치 출근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여느 때는 아이 둘을 모두 학교에 보낸 다음에 출근하던 여자가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서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갔던 것이다. 그뿐인가. 다른 날과는 달리 '부엌에 밥상 차려 왔어요'하는 의례적인 인사말조차도 없었고, 단지 아이들만 늘 하던 대로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현관에서 합창하듯 소리치고 나갔을 뿐이었다. 밥을 먹다 말고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안방에서 전화통이 울렸다. 명길은 각방거처를 하고 나서부터 아내 혼자만 쓰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그런데 전화를 건 쪽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한번 '아, 여보세요?' 하는 순간 짤깍 하고 전화가 끊어져버렸다. 누가 잘못 걸어서 그냥 전화를 끊었나… 명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부엌으로 돌아가 먹던 밥그릇을 마저 비웠다. 그러자 또다시 따르룽 따르릉 하고 전화통이 불러댔다. 수화기를 들었지만 이번에도 아무 소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쪽에서 뭐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또 전화를 끊었다. 똑같은 짓을 두 번씩이나 되풀이하다니, 어떤 자식이 대낮부터 할 짓이 없어서 이따위 장난질을 치는가 말이다! 은근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불유쾌한 기분을 가라앉혀 보려고 담배를 찾았으나 빈 갑이었다. 명길은 바지와 셔츠를 입고 집 앞 골목길 입구에 있는 구멍가게로 갔다. 그때 골목길 한쪽 가에는 검정색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는 무심코 그 곁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담배를 사서 한 대 피워 물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부르르릉 하고 시동거는 소리가 나더니 느닷없이 차안에서 낯선 사내 둘이 튀어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댁이 한명길 씨 맞지요?'둘 중에서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