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늘 현실을 배반하고 현실은 그리움을 배반하고자 한다. 이러한 둘의 관계는 이렇게 이율배반적이고 서로 충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이것 없이 살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책은 우리의 그리움이 충분히 멀고 먼 고요의 남쪽에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아직도 얼마든지 허무해하고 허탈해해도 좋다는 위로를 전하고 있다. 마굿간 곁에 푸줏간 있고/왼 손 곁에 오른 손 있고//한 사람 건너 두 사람 건너. 안개 자욱한 골목 있고//입술 바싹 마른 두레박 있고/두레박이 놓여버린 우물 있고//…―「마굿간 곁에 푸줏간 있고」 부분 한 고요가 벌떡 일어나 한 고요의 따귀를 때리듯/이별은 그렇게 맨발로 오고, 이별은 그렇게 아름다운 낱말들의 귀를 자르고/외눈박이 외로움이 외눈박이 외로움의 왼쪽 가슴에 방아쇠를 당길 듯 당길 듯/까마귀 나는 밀밭 너머 솟구치는 캄캄한 사이프러스, 거기//아무도 없소? 아무도…―「별이 빛나는 밤」 부분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나온 길은/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오직 고요의 남쪽만 방석만큼 비어 있다/길은 또 한번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온몸에 고추장을 뒤집어쓴 어떤 애잔함이, 출렁,/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하였다 ―「고요의 남쪽」전문 제3부 세한도 연작에서 시인은 소낙비, 길, 허공, 탑, 고요, 바다, 구름 등의 모든 만물 속에 깃든 것들, 스쳐지자 온 한 세상에 대한 연민과 감성을 드러낸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고요의 남쪽이 다 젖었다’고 말하고, ‘구름은 철새들이 벗어놓은 신발’이라고도 말한다. 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풍경이 드러나는 애틋한 시편 「가난한 시절」 연작에서는 이미 스쳐버린 예전의 것들에 대하여 그리움을 토로하면서도 다시 꿈꾸기를 버리지 않는 시심을 보여준다. 솟구쳐 봐, 솟구쳐 보라구/어떤 막막함이 제 이마로 어떤 막막함을 들이받네//산꿩 푸드덕 뒷산 시퍼렇게 엎질러지네 ―「가난한 시절.3」전문

강현국 시인 경북 상주 출생.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견인차는 멀리 있다』 『먼길의 유혹』 등이 있으며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교수, 《시와반시》주간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