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화신이 된 남자와 그를 제 인생의 빛이라 여겼던 여자. 강현은 집안을 몰락시키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원수, 서 사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딸 해인을 제물로 선택한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마침내 강현은 서 사장을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것은 물론 해인마저 잔인하게 능욕하고 내버린다. 사랑의 감정은 거짓이었으며 완벽하게 의도된 게임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지?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넌 사랑한다고 울며불며 내게 매달렸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쳐다보려고도 안 하잖아?” 비틀고 꼬아대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상중이며 비애에 잠긴 것쯤 상관도 안 하는 강현의 태도에 찻잔을 감싸 쥐고 있던 해인의 얼굴이 환멸과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엔 거짓말처럼 표정이 쓸려나가고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순간 강현은 허파가 긁히는 통증에 숨을 훅 들이마셨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애가 타고, 또 이렇게 질척대는 자신을 인정할 수가 없어 화가 치밀었다. “벙어리라도 된 거야? 뭐라고 대꾸 좀 해 봐. 이거야 원 심심해서 쓰겠나.” 거듭 이어지는 못된 소리에 그녀가 드디어 눈을 맞췄다. “더…… 뭘 원하세요?” “뭘 더 해 줄 수 있는데?” “…….” 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과연 극악에 빠진 이 남자가 자신이 전부를 바쳐 사랑하고 믿었던 그였는지, 끝없이 밀려드는 상실감에 속이 비어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강현은 착착 순서를 밟아가듯 점점 더 치졸해 질뿐이었다. “창의력을 발휘해봐. 네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안이 뭔지. 굳이 힌트도 필요 없을 텐데?” “내…… 목숨을 원하세요?” “뭐?” 순식간에 그의 눈이 불꽃으로 확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화염이 덮쳐 그녀를 휩쓸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해인은 동요하지 않았고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기까지 했다. 단지 실내 공기가 제법 온화한데도 한기를 느끼는 듯 귓불 밑으로 오스스 소름이 돋아 있었다. ‘저러면서 손끝조차 떨지 않다니. 지독한 계집!’ 그 아비에 그 딸이 분명했다. 강현은 그녀가 입술 떨림을 찻잔에 대고 감추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한 채 눌러 참았던 분기를 울컥 쏟아냈다. “그렇게 간단하다고 생각해? 뻔뻔스럽군. 그걸로 보상이 된다고? 아니지. 너무 쉬운 속죄지. 부족해. 한참 부족해. 흥, 너도 피해자라고? 유감스럽지만 어쩌겠어. 불행히도 넌 네 아버지 딸이니 제아무리 선량하다 해도 멍에를 짊어질 수밖에.”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삶에 대한 기대가 모조리 소실되어 바닥을 드러낸 가슴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후의 탄식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강현을 흥분시켰다. 순하디 순한 얼굴, 착한 말만 연속해서 끌어올리는 그녀가 돼먹지 않고 잔인하게 여겨졌다.

필명 서풍. 2000년 문학웹진에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 <시간의 얼굴> <스완> <그녀를 위하여> <야만의 계절> <애증의 시간> <내가 기다린 사랑> 등이 있다. E-mail : zephyr120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