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벼랑에서 살다>라는 제목의 산문집에서 독신의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 신산함과 가난한 이웃들의 생명력을 섬세하게 그려내 따뜻한 반응을 얻어냈던 조은씨가 두번째 산문집을 냈다. 전작이 시인이 몸담고 있는 현재의 시공간을 그려내었다면, 이번 산문집은 그의 내면을 형성한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더듬어낸다. 가족, 제도교육과 불화했던 나날들, 죽음을 기다리며 삶을 허비했던 날들 등 그 예민하고 우울했던 시절의 마찰과 상처를 이겨내고 한 자의식 강했던 여자 아이가 한 명의 시인으로 자라기까지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다. 조은의 이번 과거로의 여행편에 사진작가 정경자씨가 동행했다.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스태프였던 정경자씨의 조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에 매혹되었다는 조은씨. 이들은 눈에 쉽게 띄지 않지만 단단한 뿌리를 거느린 "조용한 열정"의 소유자들이란 점에서 닮은꼴이다. 글 16편과 철조망, 새장, 길, 붉은 산당화, 말라붙은 대지, 초라한 풀꽃들 등 정경자씨의 사진 68컷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번 산문집에서 독자는 시인 조은씨의 알려지지 않은 면면들과 그의 정신이 딛고 선 정서적 대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긴 긴 하루, 짧은 세월 짙은 분냄새 지독한 편식 소중한 것들은 무겁다 쓸개를 핥는 시간 일찍 피는 꽃들 허공을 딛는 마음 순간의 진실, 영원한 진실 어둠에는 덮고 자던 이불 냄새가 이기주의의 여러 모습들 난해한 사랑이여 보이는 것보다 더 엉뚱한 날들 내가 만일 그 시대를 살았다면 손의 미각(味覺) 행운을 돈으로 받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