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뜨지 않았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청명한 하늘에는 소름끼치는 만월(滿月)만이 홀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은 마치 얼어붙은 듯 적막했다.
새벽 2시, 서울 변방의 한 성당이 길게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는데,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신부(神父) 한 명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높디높은 성당 종탑을 향해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고뇌의 빛이 역력해 보였다.
종탑이기는 하지만 종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종탑 위에는 커다란 대형 십자가가 걸려있다. 신부는 아득한 아래 성당 광장에 길게 그림자로 누워있는 십자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검고 긴 사제복을 입어 분위기가 한결 어둡고 무거워 보인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성당 광장을 바라보던 그가 이번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싸늘하고 차가운 빛을 쏟아내고 있는 만월이 어두운 하늘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다.
흰 석회로 정성스럽게 만든 성모 마리아 상이 작은 정원을 홀로 지키고 서 있고. 예수는 성당 본당 정면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을 향해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옆구리의 창에 찍힌 자리와 여윈 허리와 팔뚝은 얼마나 섬세하게 만들었는지 푸른 힘줄이 고스란히 들어나고 있다. 금방이라도 고통을 참지 못하는 절규가 귀에 들려올 것만 같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조금씩 평온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머리에 지난 몇 주 전 미사 직전에 있었던 고해성사 시간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고해성사 실 앞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해를 하는 대신 한 장의 접은 종이쪽지를 불쑥 내밀었다.
신부가 놀라 그 쪽지를 펴들었다.
「신은 전설이다. 그리고 전설은 죽었다. 신부여 그대의 전설도 끝났다, 그대는 죽어야 한다.」
신부가 놀라 닫힌 쪽문을 열어 글을 내 민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저만큼 걸어가 등만 보일 뿐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사내는 심하게 절뚝이고 있었다.
그는 전율하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읽어본 일이 없는 자신의 글 일부가 아닌가?
「신은 전설이다. 그리고 전설은 죽었다.」
그리고 이어 절뚝이는 사내가 한 통의 택배 물을 보내왔다.
신부는 죽기로 작정하고 종탑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아득히 보이는 성당광장을 바라보던 신부가 두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한 뒤 그는 일순 호흡을 멈추고 광장을 향해 내리 뛰었다. 치마처럼 길고 긴 사제복이 너풀너풀 춤을 추었고 육중한 몸은 마침내 나무토막 던져지듯 콘크리트바닥에 곤두박질 쳐 떨어졌다.
"퍽!"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주위는 다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두개골이 파열되어 생명이 끊긴 것이다.
이제 그는 미사도 드릴 수 없고 강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즐기는 프랑스제 와인도 마실 수 없게 되었고 사랑하는 신도들과 한담을 나눌 수도 없게 되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그의 사체를 치워줄 사람 또한 없다. 머리에서 솟구치는 피만 아니라면 성당 광장에 엎드려 땅에 대고 입맞춤 하는 것으로 보이리라.
석회로 바른 성모 마리아상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고운 손으로 아기예수를 가슴에 품고 있지만 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신부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신부는 가톨릭이 그렇게 죄악시하는 자살을 한 것이다.
차고 푸른 달빛이 죽은 사체로 변한 신부를 스산스럽게 감싸고 있고, 밤은 무심히 깊어만 가고 있다.

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